이젠 바늘과 실이 아니라, 코드와 알고리즘이 옷을 만든다.
오늘은 기술이 바꾼 패션: AI, 3D 샘플링 그리고 가상 피팅의 현장에 대해 알아보자.
디자이너의 새로운 도구: 3D 샘플링의 시대
불과 5~10년 전만 해도 패션 디자이너의 작업실은 종이 패턴, 마네킹, 가위, 원단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습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이제 디자이너들은 패턴지를 그리기 전에 3D 프로그램을 먼저 연다. CLO, Browzwear, Optitex 같은 3D 의상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를 활용하면, 실제 옷을 만들지 않고도 디자인을 완성할 수 있다.
3D 샘플링의 가장 큰 장점은 시간과 자원 절약이다.
기존에는 옷 한 벌을 디자인할 때, 수차례 피팅과 수정을 거쳐야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원단, 실, 라벨, 그리고 시간까지 낭비됐다. 하지만 3D 툴을 사용하면, 가상의 마네킹에 옷을 입히고, 주름, 핏, 소재의 흐름까지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샘플 제작 횟수는 최대 70%까지 줄어들고, 출시까지의 시간(TTM: Time to Market)도 대폭 단축된다.
패션 산업의 가장 큰 단점 중 하나는 “느림”이었다. 하지만 3D 기술은 ‘느림’을 ‘민첩함’으로 바꿨다. 특히 빠르게 변화하는 스트리트 브랜드, D2C 브랜드, 소규모 독립 브랜드에겐 작은 리스크로 빠른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
또 하나 흥미로운 변화는, 3D 의상 디자인이 하나의 콘텐츠로 소비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디자이너들이 만든 가상의 의상을 SNS에서 영상으로 선보이거나, 아예 디지털 패션 전용 플랫폼(예: DressX, The Fabricant)에 판매하기도 한다.
즉, 3D 샘플은 더 이상 ‘생산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작품이자 제품이 되었다.
AI가 그리는 새로운 패션 언어
3D 샘플링이 ‘도구’의 변화라면, AI는 사고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
패션 디자이너가 아이디어를 스케치하던 방식은 이제 프롬프트(명령어)로 대체되고 있다. AI 이미지 생성 툴(Midjourney, DALL·E 등)을 활용해 디자이너들은 ‘무에서 유를 만드는’ 새로운 프로세스를 익히고 있다.
예를 들어,
“미래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실루엣, 반사되는 메탈릭 소재, 디스토피아 세계관에 어울리는 의상”이라는 프롬프트만으로, AI는 수십 가지 디자인 이미지를 출력한다.
이걸 기반으로 디자이너는 방향성을 잡고, 필요하면 수작업으로 다듬어 나간다.
이제 디자이너는 '창조자'이기보다, ‘큐레이터’이자 ‘편집자’에 가깝다.
또한 AI는 트렌드 분석에도 활용된다.
수십만 건의 SNS 게시물, 런웨이 사진, 패션 리뷰, 검색 데이터를 분석하여
“올 가을엔 레드 계열의 가죽 소재가 뜰 것이다”
같은 통계 기반 인사이트를 제공할 수 있다.
스타일닷컴, WGSN, Heuritech 같은 플랫폼은 이미 AI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한 트렌드 리포트를 상용화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은 특히 대기업이나 글로벌 브랜드가 아닌, 중소 브랜드들에게 더 유용하다.
막대한 자본 없이도, 데이터 기반의 예측과 디자인 구상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결국 AI는 ‘창의력’을 대체하기보단, 창의력의 지형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온라인 쇼핑의 게임체 changer: 가상 피팅과 디지털 패션
우리가 온라인에서 옷을 고를 때 가장 망설이는 지점은 하나다.
“이게 나한테 잘 맞을까?”
사이즈도, 핏도, 색감도 사진만 보고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술이 가상 피팅(Virtual Fitting)이다.
대표적인 예가 ZEPETO, ZERO10, Snap AR, 그리고 Amazon의 Virtual Try-On이다.
이들은 AR 기반 기술로 사용자의 실루엣, 체형, 얼굴을 스캔한 후, 실제처럼 옷을 입혀볼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
이제는 휴대폰만 들고도 거울 앞에 선 것처럼 옷을 가상으로 입어볼 수 있는 시대다.
그뿐만 아니라, ‘디지털 전용 의상’도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
“현실에서 입을 수 없지만, SNS나 메타버스에서 입는 옷”이라는 개념이다.
디지털 드레스를 구매해 사진 속 내 얼굴에 합성하거나, 가상 아바타에게 입히는 것이 새로운 소비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시장은 게임 유저, NFT 수집가, 콘텐츠 크리에이터 등 다양한 집단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 중이다.
이러한 기술은 단순히 '재밌다'는 수준을 넘어 환경과 생산 비용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전환점이다.
실제 옷을 만들지 않고도 스타일링을 시도해볼 수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샘플 제작과 반품을 줄이고, 탄소 배출량까지 감소시킬 수 있다.
즉, 기술은 소비자 경험을 개선하는 동시에, 패션 산업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마무리하며: 기술이 바꾸는 건 '패션'이 아니라 '패션을 대하는 태도'
우리는 지금 패션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기술은 더 이상 ‘부가적인 요소’가 아니라, 패션의 본질을 정의하는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진짜 변화는 기술 그 자체보다, 그 기술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태도다.
3D 샘플을 ‘가짜’라고 보던 시절은 끝났다.
AI가 만든 디자인을 ‘인간적이지 않다’고 말하던 관념도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디지털 옷이 ‘쓸모없다’는 편견도 SNS 세대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이제 패션은 물리적인 옷이 아니라, 경험이고 이야기이고, 정체성의 확장이다.
디지털 패션이 무섭게 느껴지는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고,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의 한가운데, 우리가 있다.